4부: 3세기의 대박해와 승리 (250-313년)
15장: 데키우스의 제국적 박해
3세기의 위기
3세기 중반, 로마 제국은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역사가들은 이것을 "3세기의 위기"라고 부른다.
황제들이 빠르게 교체되었다. 235년부터 284년까지 50년간 약 50명의 황제가 등장했다. 대부분 군인 황제들이었고, 군대의 지지로 권력을 잡았다가 몇 년 안에 암살당했다.
변경에서는 이민족들이 침입했다. 북쪽에서는 게르만 부족들이, 동쪽에서는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가 로마를 압박했다.
경제는 붕괴했다. 화폐 가치가 폭락했다. 인플레이션이 심했다. 무역이 위축되었다.
역병이 다시 퍼졌다. 250년경부터 시작된 키프리아누스 역병은 수십 년간 제국을 괴롭혔다.
제국의 통일성이 위협받았다. 어떤 지역은 분리 독립을 시도했다. 260년대에는 갈리아 제국과 팔미라 제국이 잠시 독립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황제들은 제국의 통일을 강화하려 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종교적 통일이었다. 모든 시민이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려야 한다. 제국의 통일을 위해.
데키우스 황제 (249-251년)
249년, 군인 데키우스(Decius)가 황제가 되었다. 그는 판노니아 출신의 장군이었다. 전임 황제 필립푸스 아라부스를 패배시키고 권력을 잡았다.
데키우스는 로마의 전통 가치를 회복하려 했다. 그는 제국의 위기가 신들을 버린 데서 온다고 믿었다. 로마가 다시 신들을 공경하면 제국이 회복될 것이라고.
250년, 데키우스는 칙령을 내렸다. 제국 역사상 최초의 전국적이고 조직적인 박해였다.
칙령의 내용은 이러했다:
- 모든 시민은 정해진 날짜까지 신들에게 제사를 드려야 한다
- 지역 관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제사를 드린다
- 제사를 드린 후 증명서(libellus)를 받는다
- 증명서가 없는 자는 처벌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만을 표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시민이 대상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거부하는 자들은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리벨루스 - 제사 증명서
증명서(libellus)의 형식이 보존되어 있다. 이집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들에 실제 증명서들이 남아있다. 한 예는 이렇다:
"제1위원회에게. 알렉산드로스의 딸 아우렐리아 아미아스로부터, 테오게네스와 함께, 테오게네스 마을에서. 나는 항상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습관이 있었고, 이제 여러분 앞에서 칙령에 따라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붓고 제물을 맛보았으며, 이 서류에 서명해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나 아우렐리아 아미아스가 제출했습니다. 나 아우렐리오스 사라스가 그녀를 대신하여 썼습니다. 그녀는 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형식적인 문서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배교를 의미했다.
교회의 위기
교회는 준비되지 않았었다. 이전의 박해들은 대부분 지역적이고 산발적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국 전역에서 동시에,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즉시 제사를 드렸다. 두려움 때문에, 혹은 사회적 압력 때문에. "배교자들(lapsi)"이라고 불렸다.
어떤 이들은 제사는 드리지 않았지만 돈으로 증명서를 샀다. 부패한 관리들이 실제로 제사를 드리지 않았어도 증명서를 팔았다. "증명서 소유자들(libellatici)"이라고 불렸다.
어떤 이들은 완강히 거부했다. 그들은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순교했다. "고백자들(confessors)"이라고 불렸다.
키프리아누스, 카르타고의 감독은 이렇게 썼다:
"시험이 왔을 때 많은 이들이 싸움도 없이 패배했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끌려가기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많은 이들이 첫 번째 말에 무너졌다... 그들은 달려가서 스스로를 파멸로 넘겼다."
"여러 날 동안 제사를 드리는 자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남자, 여자, 어린이, 모든 연령과 성별이 제단으로 몰려갔다."
배교의 규모는 충격적이었다. 어떤 교회에서는 절반 이상이 배교했다.
고백자들과 순교자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끝까지 저항했다.
로마의 감독 파비아누스(Fabianus)가 순교했다. 250년 1월 20일의 일이었다. 그는 20년 동안 로마 교회를 이끌었던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알렉산드리아의 레오니데스가 순교했다. 그는 위대한 신학자 오리게네스의 아버지였다. 참수되었다.
안티옥의 감독 바빌라스(Babylas)가 순교했다. 그는 투옥되어 쇠사슬에 묶인 채 죽었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감옥에 갇혔다. 고문당했다. 그러나 데키우스는 순교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배교를 원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오랜 투옥과 고문을 견뎌야 했다.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
카르타고의 감독 키프리아누스(Cyprian)는 도피했다. 그는 교회를 버린 것이 아니었다. 은신처에서 편지를 통해 교회를 계속 지도했다.
어떤 이들이 비난했다. "감독이 양들을 버리고 도망쳤다!"
키프리아누스는 변호했다. 주님도 때로 피하셨다고. 더 큰 사역을 위해 보존되는 것이 지혜라고.
그는 은신처에서 많은 편지를 썼다. 배교자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증명서를 산 자들은? 고문당하다 배교한 자들은?
교회는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했다. 너무 엄격하면 많은 이들을 잃는다. 너무 관대하면 신앙의 순수성을 잃는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디오니시우스도 도피했다. 그는 나중에 그 상황을 기록했다.
"나는 홀로 도망간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내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형제들도 집사들도 모두 흩어졌다. 나는 머물며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싸우려 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다른 곳으로 이끄셨다."
그는 리비아의 사막 지역으로 도피했다. 거기서 그는 유배자들과 고백자들을 돌보며 편지로 교회를 지도했다.
디오니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어난 일들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메트라스(Metras)라는 노인이 있었다. 그들은 그에게 불경건한 말을 하라고 명령했다. 그가 거부하자 몸 전체를 막대기로 때리고, 날카로운 갈대로 얼굴과 눈을 찔렀다. 그를 교외로 끌고 가 돌로 쳤다."
"퀸타(Quinta)라는 여자가 우상 신전으로 끌려가 경배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녀가 혐오감을 드러내며 돌아서자, 그들은 그녀의 발을 묶어 온 도시를 끌고 다니며 거친 포장도로에 그녀를 두들겼다. 그리고 돌로 쳤다."
"이 후 모든 사람이 광란에 빠졌다. 그들은 무기를 들고 그리스도인들의 집으로 달려가 가장 잘 아는 이웃들을 약탈하고 빼앗았다. 더 귀중한 물건들은 가져가고, 나머지는 거리에 던지고 불태웠다."
그러나 디오니시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의 반응도 기록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약탈자들에게 기쁨과 웃음으로 양보했다. 나는 아직까지 누구도 주님을 부인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기쁘게 받아들였다."
박해의 끝
251년 6월, 데키우스가 고트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는 황제로서 전장에서 죽은 최초의 로마 황제였다.
그의 후계자 갈루스(Gallus)는 박해를 계속하지 않았다. 칙령은 사실상 무효화되었다.
데키우스의 박해는 약 1년 반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 영향은 깊었다.
많은 순교자가 나왔다. 그러나 더 많은 배교자가 나왔다. 교회는 치유해야 할 큰 상처를 입었다.
배교자들의 문제
박해가 끝난 후 큰 문제가 남았다. 배교한 자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많은 배교자들이 회개하며 돌아오기를 원했다. "우리는 약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다시 교회로 받아주십시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단호했다. "안 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두 번째 기회가 없습니다."
특히 고백자들 중 일부가 이런 입장이었다. "우리는 고문을 견뎠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쉽게 굴복했습니다. 어떻게 같은 교회에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다른 이들은 자비를 주장했다. "주님도 베드로를 용서하지 않으셨습니까? 베드로도 주님을 부인했지만 회개 후 다시 받아들여졌습니다."
키프리아누스는 중도적 입장을 취했다. 그는 "배교자들의 문제에 대하여(De Lapsis)"라는 논문을 썼다.
그의 입장은:
- 배교자들은 즉시 받아들여질 수 없다
- 그러나 영원히 배제되어서도 안 된다
- 진정한 회개를 보여야 한다
- 참회의 기간을 거쳐야 한다
- 감독이 각 경우를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
- 죽음의 위기에 있는 자는 즉시 받아들일 수 있다
키프리아누스는 썼다:
"우리는 아무도 교회에서 배제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가능한 한 모든 이를 모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서두름은 위험합니다. 진정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의사는 상처를 보고 환자의 고통을 만집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부드럽게 다룹니다. 상처를 급하게 만지면 더 악화됩니다."
노바티아누스의 분열
로마에서 더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다. 감독 파비아누스가 순교한 후, 새 감독을 선출해야 했다.
251년, 코르넬리우스(Cornelius)가 선출되었다. 그는 온건파였다. 배교자들을 회개 후 받아들이는 정책을 지지했다.
그러나 노바티아누스(Novatianus)라는 사제가 반대했다. 그는 엄격주의자였다. "배교자들은 절대로 교회로 돌아올 수 없다"고 주장했다.
노바티아누스는 자신을 로마의 대립 감독으로 선언했다. 그를 따르는 자들이 분리하여 자신들의 교회를 만들었다.
"순결한 자들(Katharoi, 또는 Puritans)"이라고 자칭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진정한 교회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교회 역사의 첫 번째 주요 분열 중 하나였다. 노바티아누스파는 수십 년간 지속되었다.
키프리아누스는 코르넬리우스를 지지했다. 그는 노바티아누스를 비판하며 "교회의 통일에 대하여(De Unitate Ecclesiae)"를 썼다.
"아무도 교회 밖에서 순교자가 될 수 없다... 교회의 평화를 파괴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없다."
"교회는 하나다. 비록 많은 지역 교회들이 있지만, 그들은 하나의 교회다. 마치 태양의 광선은 많지만 빛은 하나인 것처럼."
데키우스의 박해는 끝났지만, 그 여파는 오래 계속되었다. 교회는 순교자들의 영광과 배교자들의 상처, 그리고 분열의 고통을 모두 경험했다.
16장: 발레리아누스와 키프리아누스의 순교
잠시의 평화
데키우스가 죽은 후(251년) 약 6년간 교회는 상대적 평화를 누렸다.
황제 갈루스(251-253)는 박해를 재개하려 했으나 효과적이지 않았다. 역병과 전쟁이 계속되었고, 그는 곧 암살당했다.
발레리아누스(Valerian)가 253년에 황제가 되었을 때, 처음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우호적이었다. 유세비우스는 기록했다. "그의 궁정은 경건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교회는 성장했다. 건물을 세웠다. 재산을 모았다. 조직을 강화했다. 많은 귀족들이 개종했다.
이 평화의 시기에 키프리아누스는 카르타고 교회를 재건했다. 배교자들을 돌봐주고, 교회의 통일을 강화했다.
키프리아누스 역병
그러나 새로운 재앙이 왔다. 252년경부터 무서운 역병이 제국을 휩쓸었다. "키프리아누스 역병"이라 불린다. 키프리아누스가 이것에 대해 상세히 기록했기 때문이다.
키프리아누스는 "역병에 대하여(De Mortalitate)"라는 논문을 썼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매일 쓰러지는가! 얼마나 빠르게 죽어가는가! 집마다 시체가 있다. 거리마다 애도가 있다."
증상은 끔찍했다. 심한 설사로 시작되었다. 구토, 열, 목의 궤양, 눈의 감염, 사지의 괴저.
디오니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상황을 기록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움과 이기심에서 환자들을 피했다. 가까운 친척도 버렸다. 시체를 거리에 던졌다. 매장되지 않은 시체들이 썩어갔다."
- "그러나 우리 형제들 중 많은 이들이 다르게 행동했다. 그들은 환자를 돌보았다. 많은 이들이 다른 사람들을 간호하다 감염되어 죽었다. 가장 훌륭한 형제들이 이런 식으로 떠났다."
-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은 주목받았다. 그들은 자신의 신자뿐 아니라 이교도들도 돌보았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전에 썼던 것처럼, "보라, 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사랑하는가!"
그러나 이교도들은 다르게 반응했다. "그리스도인들 때문이다! 그들이 신들을 노하게 해서 신들이 역병을 보냈다!"
발레리아누스의 돌변
257년, 발레리아누스가 갑자기 정책을 바꿨다. 무엇이 그를 변화시켰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도 역병, 경제 위기, 페르시아와의 전쟁 등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고문 마크리아누스의 영향도 컸다. 마크리아누스는 이집트 마술사였고 그리스도인들을 싫어했다.
257년 8월, 발레리아누스는 칙령을 내렸다. 이번에는 성직자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칙령의 내용:
-
- 감독, 사제, 집사는 로마의 의식에 참여해야 한다
- 거부하는 자는 유배된다
- 그리스도인들은 모임을 가질 수 없다
- 묘지에 모이는 것도 금지된다
이것은 교회의 지도부를 제거하려는 시도였다.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키프리아누스의 첫 번째 재판
257년 8월 30일, 카르타고의 총독이 키프리아누스를 소환했다. 총독의 이름은 아스파시우스 파터누스(Aspasius Paternus)였다.
재판 기록이 보존되어 있다. "키프리아누스의 순교록 첫 번째 부분(Acta Proconsularia, First Part)"이다.
총독: "가장 신성한 황제들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 로마 종교를 따르지 않는 자들은 로마 의식을 인정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나는 당신의 이름을 물었다. 당신은 무엇이라고 대답하는가?"
키프리아누스: "나는 그리스도인이며 감독이다. 나는 오직 한 분 참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알지 못한다. 그분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하나님을 섬기고, 밤낮으로 그분께 간구한다. 우리 자신과 모든 사람을 위해, 그리고 황제들의 안전을 위해."
총독: "당신은 유배되기를 고집하는가?"
키프리아누스: "유배하십시오."
총독: "가장 신성한 황제들은 의식뿐 아니라 제사에 대해서도 명령했다."
키프리아누스: "나는 제사를 드리지 않을 것이다."
총독: "생각해보십시오."
키프리아누스: "이렇게 정의로운 문제에서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키프리아누스는 쿠루비스(Curubis)라는 작은 마을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계속 편지를 쓰며 교회를 지도했다.
로마의 식스투스 2세
로마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감독 식스투스 2세(Sixtus II)가 257년 8월에 재판을 받고 유배되었다.
그러나 258년, 발레리아누스가 두 번째 칙령을 내렸다. 더 가혹한 것이었다.
-
- 감독, 사제, 집사는 즉시 처형된다
- 원로원 계급의 그리스도인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계속 거부하면 처형된다
- 기사 계급의 그리스도인도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된다
- 황실 직원인 그리스도인은 노예로 강등되고 황실 농장으로 보내진다
이것은 체계적인 박해였다. 그리스도교를 제국에서 제거하려는 시도였다.
식스투스 2세의 순교
258년 8월 6일, 식스투스 2세가 아피안 가도의 카타콤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군인들이 습격했다.
식스투스는 자신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가르치고 있었을 것이다. 군인들이 즉시 그를 참수했다. 네 명의 집사도 함께 순교했다.
키프리아누스가 카르타고에서 소식을 듣고 편지를 썼다. "우리의 동료 감독 식스투스가 258년 8월 6일 로마에서 순교했습니다. 네 명의 집사도 함께였습니다."
집사 로렌스의 순교
식스투스의 집사 중 한 명이 로렌스(Lawrence)였다. 그는 처형 현장에 없었다. 로마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렌스가 식스투스가 순교하러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그가 울며 물었다.
"아버지여, 당신의 아들을 어디에 남기고 가십니까? 신성한 제사장이시여, 당신의 집사를 어디에 버리십니까? 당신은 내가 주님의 피를 나누어 주는 것을 허락하셨는데, 이제 당신의 피 흘림을 나누는 것은 거부하십니까?"
식스투스가 대답했다. "내가 너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더 큰 싸움이 너를 기다린다. 우리는 노인이므로 쉬운 길을 간다. 그러나 너는 젊은이로서 더 영광스러운 승리가 예비되어 있다. 사흘 후 너는 나를 따를 것이다."
로마 당국은 로렌스를 체포했다. 그들은 교회의 재산에 관심이 있었다. 소문에 따르면 교회는 큰 부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총독이 로렌스에게 명령했다. "교회의 보물을 가져오라. 사흘을 주겠다."
로렌스가 대답했다. "주신 시간에 감사드립니다. 사흘이면 충분합니다."
로렌스는 카타콤을 돌아다녔다. 교회의 귀중품들을 모두 팔았다. 성찬기, 촛대, 은그릇들. 그리고 그 돈을 가난한 자들, 과부들, 고아들, 병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흘째 되는 날, 로렌스가 총독 앞에 나타났다. 그의 뒤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따랐다. 가난한 자들, 장님들, 절름발이들, 나병환자들.
로렌스가 선언했다. "이들이 교회의 보물입니다. 진정한 보물입니다. 이 보물들은 감소하지 않고 오히려 증가합니다."
총독이 분노했다. "감히 나를 조롱하느냐!"
로렌스가 평온하게 대답했다. "나는 조롱하지 않습니다. 진실을 말할 뿐입니다. 당신이 귀금속을 원한다면, 나는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을 주었습니다. 이 가난한 자들이 하늘의 보물을 쌓게 해주었으니까요."
화형대 위의 로렌스
총독은 로렌스를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처형하기로 했다. 천천히 불에 굽는 것이었다.
그들은 쇠로 만든 격자를 준비했다. 불 위에 놓을 수 있는. 로렌스를 그 위에 눕혔다.
불이 아래에서 타올랐다. 천천히. 로렌스의 몸이 구워지기 시작했다. 살이 타는 냄새가 났다.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설에 따르면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로렌스가 고통 중에도 유머를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참 후 로렌스가 말했다. "이쪽은 다 익었으니 뒤집으시오."
집행자들이 실제로 그를 뒤집었다. 계속 불에 굽혔다.
로렌스가 다시 말했다. "이제 다 익었습니다. 당신도 한 조각 드시겠습니까?"
이것이 역사적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쩌면 후대의 기독교인들이 추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로렌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을 초월했다. 그의 영은 육신의 고통 위에 있었다. 그는 이미 승리했다.
마침내 로렌스는 숨을 거두었다. 258년 8월 10일이었다. 식스투스가 말한 대로 사흘 후였다.
로렌스의 순교는 로마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많은 이교도들이 그의 용기에 감동받았다. 어떻게 사람이 그런 고통 중에도 평화로울 수 있는가? 무엇이 그에게 그런 힘을 주는가?
전설에 따르면 로렌스의 순교 이후 로마에서 많은 개종이 일어났다고 한다. 황제의 경호원 중 일부, 심지어 원로원 의원들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렌스의 무덤 위에 큰 성당을 세웠다. 산 로렌초 푸오리 레 무라(San Lorenzo fuori le Mura). 로마의 일곱 대성당 중 하나다.
로렌스는 가난한 자들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집사들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그리고 요리사들의 수호성인도 되었다. 화형대에서 순교했기 때문에.
키프리아누스의 두 번째 재판
258년 9월, 키프리아누스가 유배지에서 카르타고로 소환되었다. 새 총독 갈레리우스 막시무스(Galerius Maximus)가 부임했고, 그는 칙령을 엄격하게 집행하려 했다.
9월 13일, 키프리아누스가 총독의 사무실에 끌려갔다.
재판 기록이 보존되어 있다. "키프리아누스의 순교록 두 번째 부분"이다.
총독 갈레리우스 막시무스: "당신이 타스키우스 키프리아누스인가?"
키프리아누스: "그렇습니다."
총독: "당신이 가장 불경건한 사람들의 교황(papa, 아버지)으로 자처하는가?"
키프리아누스: "그렇습니다."
총독: "가장 신성한 황제들이 당신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했다."
키프리아누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총독: "생각해보십시오."
키프리아누스: "명령하신 대로 하십시오. 이렇게 명백한 문제에서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총독은 참모들과 상의했다. 그리고 판결문을 읽었다.
"당신 타스키우스 키프리아누스는 오랫동안 불경건한 마음 안에 살았고, 매우 많은 사악한 음모의 사람들을 자신에게 모았으며, 신들의 적으로 자신을 세웠다. 경건하고 가장 신성한 프린켑스(황제)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와 가장 고귀한 카이사르 발레리아누스가 당신을 당신의 종교로 불러들이려 했으나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당신은 가장 사악한 범죄의 창시자이며 기수로 발견되었으므로, 당신은 예가 될 것이다... 타스키우스 키프리아누스가 칼로 처형되도록 명령한다."
키프리아누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판결이 선고되자 그곳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외쳤다. "우리도 그와 함께 참수되게 하소서!"
군중 사이에 큰 혼란이 일어났다. 많은 형제들이 키프리아누스를 따라 순교장으로 갔다.
키프리아누스의 순교
키프리아누스는 세스투스의 들판(Campus Sextus)으로 끌려갔다. 처형장이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를 따랐다. 그들은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와 작별하고 싶었다.
키프리아누스가 도착하여 옷을 벗기 시작했다. 겉옷을 벗어 집사들에게 주었다.
그는 아마포 속옷만 남기고 무릎을 꿇었다. 땅에 엎드려 기도했다. 주님께 감사하며. 이 영광을 주신 것에 대해.
그는 일어나 집행자에게 25금화를 주었다. 집행자에 대한 선물이었다. 빨리 끝내달라는 부탁이었을지도.
형제들이 그의 앞에 천을 펼쳤다. 피를 받기 위해.
키프리아누스가 손수건으로 눈을 가렸다. 자신의 손으로.
한 사제와 한 부제사가 그의 손을 묶어주었다.
집행자가 칼을 들었다. 떨렸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었다. 수천 명이 존경하는 감독이었다.
칼이 내려왔다. 키프리아누스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형제들이 즉시 천을 내려 피를 받았다. 그의 시신을 감쌌다. 그들은 밤에 횃불 행렬로 그를 묘지로 옮겼다. 기도하며, 찬송하며.
258년 9월 14일이었다. 키프리아누스는 약 10년간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섬겼다. 그는 위대한 목자였고, 신학자였고, 마지막에는 순교자가 되었다.
키프리아누스의 유산
키프리아누스는 초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다. 그의 저작들은 라틴 교회 신학의 기초를 놓았다.
그의 주요 저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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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통일에 대하여(De Unitate Ecclesiae)" - 교회론의 고전
- "배교자들에 대하여(De Lapsis)" - 참회와 용서에 대한 논문
- "주님의 기도에 대하여(De Dominica Oratione)" - 영성 신학
- "역병에 대하여(De Mortalitate)" - 고난의 신학
- 많은 편지들 - 교회 역사의 귀중한 자료
그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것은 교회의 통일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감독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감독이 교회 안에 있고 교회가 감독 안에 있다." 감독과 교회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키프리아누스는 목자였다. 박해 중에도 교회를 돌보았다. 배교자들을 심판하면서도 자비를 잃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생명으로 양들을 위한 사랑을 증명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나중에 키프리아누스에 대해 말했다. "그는 웅변으로 유명하고, 순교로 영광스럽다."
제국 전역의 박해
키프리아누스와 로렌스만이 아니었다. 발레리아누스의 박해는 제국 전역을 휩쓸었다.
스페인의 타라고나에서 감독 프룩투오수스(Fructuosus)와 두 집사 아우구리우스와 에울로기우스가 순교했다.
그들은 원형경기장에서 산 채로 불태워졌다. 259년 1월 21일이었다.
재판 기록이 보존되어 있다. 프룩투오수스가 총독에게 말했다. "한 분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니, 나는 그분을 경배합니다."
화형대에서 신자들이 그의 족쇄를 풀려고 했다. 프룩투오수스가 말했다. "그대로 두십시오. 나를 풀어주실 분이 계십니다."
불길 속에서 그는 기도했다.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이교도들을 위해. 온 세상을 위해.
갈리아에서는 디오니시우스(Dionysius)가 순교했다. 후에 파리의 수호성인이 되는 인물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참수당한 후 자신의 머리를 들고 6마일을 걸었다고 한다.
소아시아에서는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다. 니코메디아, 안티옥,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레아에서.
이집트에서는 특히 많았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디오니시우스가 기록했다. "박해가 너무 커서 개별 순교자들의 이름을 기록할 수 없다."
박해의 끝
260년, 발레리아누스가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와의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는 사산 왕 샤푸르 1세에게 포로로 잡혔다.
로마 황제가 적에게 포로가 된 것은 전무후무한 치욕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샤푸르가 발레리아누스를 발판으로 사용하여 말에 올랐다고 한다. 그는 페르시아에서 노예로 죽었다.
그의 아들 갈리에누스(Gallienus)가 단독 황제가 되었다. 갈리에누스는 즉시 박해를 중단했다.
260/261년, 그는 관용 칙령을 발표했다. 그리스도교를 사실상 인정하는 것이었다.
칙령의 내용:
-
-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다
- 감독들은 자신의 직무로 돌아갈 수 있다
- 몰수된 교회 재산은 반환된다
- 묘지와 예배 장소가 돌려진다
이것은 놀라운 전환이었다. 공식적인 관용 칙령이었다. 비록 그리스도교를 완전히 합법화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인정한 것이었다.
40년간의 평화가 시작되었다. 교회는 숨을 돌렸다. 성장했다. 조직을 강화했다.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폭풍 전의 고요함이었다. 가장 큰 박해가 아직 남아 있었다.
제17장: 40년의 평화와 교회의 성장
갈리에누스의 관용 (260-268년)
갈리에누스는 아버지 발레리아누스와는 완전히 다른 정책을 취했다. 그는 실용주의자였다. 박해가 효과가 없다는 것을 보았다. 오히려 제국에 해롭다고 판단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수백만 명이었다. 모든 계층에 퍼져 있었다. 군대에도, 관청에도, 심지어 황실에도. 그들을 모두 박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불필요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좋은 시민이었다. 법을 지켰다. 세금을 냈다. 제국에 충성했다. 단지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지 않을 뿐이었다.
갈리에누스는 결정했다. 그들을 그대로 두자. 그들의 종교를 인정하자. 그러면 평화가 올 것이다.
유세비우스는 그의 칙령을 인용했다:
"황제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가... 감독 디오니시우스와 다른 감독들에게, 그리고 사제들에게 명령한다. 나의 은사의 혜택을 향유하라... 나는 너희가 '종교적 장소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명령했다."
이것은 사실상의 관용 칙령이었다. 그리스도교가 허용되는 종교(religio licita)가 된 것은 아니었다. 법적으로는 여전히 불법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묵인되었다.
교회의 황금기
40년간(260-303년) 교회는 전례 없는 평화와 성장을 경험했다.
건물을 지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주로 집에서 모였다. 이른바 "가정 교회(domus ecclesiae)"였다. 이제 공식적인 교회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시리아의 두라 유로포스에서 발견된 가정 교회(232년경)가 가장 오래된 예다. 그러나 260년 이후에는 더 크고 화려한 건물들이 세워졌다.
재산을 모았다. 교회는 이제 법적으로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다. 토지, 건물, 자금. 이것으로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과부와 고아를 지원하고, 병자를 치료했다.
조직을 발전시켰다. 감독-사제-집사의 삼중 구조가 확립되었다. 대도시의 감독들은 주교로 불리며 지역 교회들을 감독했다.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옥이 세 대도시였다. 이들의 감독들이 가장 영향력 있었다. 후에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이 추가되어 5대 총주교좌가 되었다.
신학이 꽃피었다. 평화의 시기에 교회는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 신앙을 체계화했다. 이단과 싸웠다. 진리를 명확히 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번성했다. 오리게네스(185-254)의 영향이 컸다. 그는 성경 주석, 조직신학, 영성신학의 선구자였다. 비록 그의 일부 견해는 후에 논쟁의 대상이 되었지만.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263경-339)가 나왔다. 그는 후에 "교회사의 아버지"가 될 것이었다.
신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박해의 위험이 없어지자 많은 이들이 개종했다. 어떤 역사가들은 3세기 말에 제국 인구의 10% 정도가 그리스도인이었다고 추정한다.
평화의 대가
그러나 평화에는 대가가 있었다. 박해가 없어지자 교회는 다른 문제들에 직면했다.
세속화가 시작되었다. 많은 이들이 깊은 신앙 없이 교회에 들어왔다. 사회적 이유로, 경제적 이유로, 심지어 정치적 이유로.
도나투스주의자들이 후에 비판했듯이, "황제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다. 진정한 회심 없이 이름만 그리스도인인 자들.
부가 문제가 되었다. 일부 교회는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이것이 권력 다툼을 낳았다. 감독직이 권력의 자리가 되었다.
로마에서 268년, 감독 선출을 둘러싸고 폭력 사태가 일어났다. 다마수스와 우르시누스가 경쟁했다. 다마수스 지지자들이 우르시누스 지지자들을 공격하여 137명이 죽었다.
이단들이 생겨났다. 박해 중에는 생존이 중요했다. 이단 논쟁은 사치였다. 그러나 평화 시에는 신학적 문제들이 표면으로 떠올랐다.
사벨리우스주의: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의 세 가지 양태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아리우스주의의 씨앗: 아직 본격화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마니교: 페르시아의 마니가 창시한 이원론적 종교. 빛과 어둠, 영과 물질의 영원한 투쟁을 가르쳤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유혹받았다.
안티옥의 바울 사건
가장 큰 논쟁 중 하나가 안티옥의 감독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바울은 260년대에 안티옥의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신학은 의심스러웠다. 그는 그리스도가 신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사람이라고 가르쳤다.
더 나쁜 것은 그의 행동이었다. 그는 오만하고 교만했다. 부를 사랑했다. 팔미라의 여왕 제노비아의 재정 관리로 일하며 정치에 깊이 관여했다.
교회는 반대했다. 264년과 268년 두 차례 공의회가 열렸다. 안티옥과 주변 지역의 감독들이 모였다.
268년 공의회는 바울을 정죄하고 파문했다. 그의 신학도, 그의 행동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바울은 감독관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 권력이 있었다. 제노비아가 그를 지지했다.
273년,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가 팔미라를 정복했다. 그때 바울의 문제가 황제에게 제기되었다.
놀랍게도 아우렐리아누스가 교회 편을 들었다. 그는 결정했다. 감독관은 "이탈리아와 로마의 감독들이 인정하는 자"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이것은 중요한 선례였다. 이교도 황제가 교회 분쟁에 개입하여 로마 감독의 권위를 인정한 것이다.
바울은 쫓겨났다. 그러나 이 사건은 교회가 직면한 새로운 문제들을 보여주었다. 권력, 부, 정치, 이단.
순교자들의 기억
평화의 시기에도 교회는 순교자들을 잊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기념했다.
순교자들의 날이 정해졌다. 매년 그들의 순교일에 기념 예배를 드렸다. 그들의 무덤에서 성찬식을 거행했다.
순교자 행전들이 기록되고 편집되었다. 페르페투아, 폴리캅, 이그나티우스, 키프리아누스의 이야기들이 필사되어 교회들 사이에 돌아다녔다.
순교자 숭배가 발전했다. 그들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 여겼다. 그들의 유물이 귀하게 여겨졌다. 그들의 무덤이 순례지가 되었다.
이것은 후에 논쟁의 대상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초대 교회에게 순교자들은 신앙의 영웅들이었다. 그들의 증언이 교회를 세웠다. 그들의 피가 씨앗이 되었다.
카타콤의 벽화들이 그려졌다. 순교 장면들, 낙원의 이미지들, 그리스도의 형상들. 예술을 통해 신앙을 표현했다.
찬송들이 만들어졌다. 순교자들을 찬양하는 노래들. 그들의 용기를 기념하는 시들.
교회는 평화 속에서도 순교의 정신을 유지하려 했다. 순교가 피 흘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쳤다. 매일의 자기 부인, 세상과의 싸움, 육신의 욕망을 죽이는 것 - 이것도 순교라고.
수도원 운동의 시작
이러한 배경에서 수도원 운동이 시작되었다. 평화의 시기에 어떻게 급진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가?
이집트의 안토니우스(251경-356)가 선구자였다. 270년경, 그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말씀을 듣고 모든 것을 버렸다.
그는 사막으로 들어갔다. 홀로 하나님을 찾기 위해. 금욕과 기도의 삶을 살았다. 악마와 싸웠다. 영적 전쟁을 치렀다.
많은 이들이 그를 따랐다. 사막의 교부들(Desert Fathers)이 생겨났다. 그들은 세상을 떠나 하나님만을 추구했다.
이것은 일종의 "백색 순교(white martyrdom)"였다. 피 흘리는 순교(적색 순교)가 불가능해지자, 그들은 자아를 죽이는 순교를 택했다.
아타나시우스가 후에 안토니우스의 전기를 썼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수도원 운동을 전 제국에 퍼뜨렸다.
마지막 황제들
갈리에누스가 268년에 암살당한 후, 여러 군인 황제들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에게 관용적이었다.
클라우디우스 2세(268-270): 짧은 재위. 관용 정책 유지.
아우렐리아누스(270-275): 강력한 황제. 제국을 재통일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관용적이었다. 그러나 말년에 박해를 준비했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암살당하여 실행되지 않았다.
타키투스, 프로부스, 카루스(275-284): 모두 짧은 재위. 큰 박해 없음.
교회는 계속 성장했다. 이제 모든 도시에 교회가 있었다. 시골까지 복음이 퍼졌다. 모든 계층에 그리스도인이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등장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가 황제가 되었다. 그는 뛰어난 행정가였다. 제국을 근본적으로 개혁했다.
사두 정치(Tetrarchy)를 확립했다. 제국을 넷으로 나누어 네 명의 통치자가 다스리게 했다. 두 명의 아우구스투스(정제)와 두 명의 카이사르(부제).
디오클레티아누스 자신이 동방의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 막시미아누스가 서방의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가 카이사르가 되었다.
이 체제는 제국을 안정시켰다. 경제를 회복했다. 군대를 강화했다. 국경을 방어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처음 18년간(284-302) 그리스도인들을 내버려두었다. 그의 궁정에도 그리스도인들이 많았다. 그의 아내 프리스카와 딸 발레리아가 그리스도인이거나 그리스도교에 호의적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리스도인들은 안심했다. 박해의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제 영원한 평화가 올 것이라고.
그러나 그들은 틀렸다. 가장 큰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제18장: 대박해 -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칼날
박해의 전조
302년,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여러 사건이 겹쳤다.
안티옥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사를 드리려 했다. 점술사들이 동물의 간을 조사했다. 그러나 징조를 읽을 수 없었다.
점술사들이 말했다. "그리스도인들 때문입니다. 그들이 십자가 표시를 하여 악마들을 쫓아버렸습니다."
황제가 분노했다. 궁정의 모든 사람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했다. 거부하는 자는 채찍질당했다.
군대에도 같은 명령이 내려졌다. 모든 군인이 제사를 드려야 했다. 거부하는 자는 제대당했다. 일부는 처형되었다.
한 백부장이 제사를 거부했다. 그의 이름은 마르켈루스였다. 그는 공개적으로 군복을 벗고 무기를 버렸다.
"나는 더 이상 당신들의 황제들을 섬기지 않겠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영원한 왕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그는 즉시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298년의 일이었다.
갈레리우스의 영향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부제 갈레리우스가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했다. 그의 어머니가 열렬한 이교도였고, 그리스도인들을 적대시하도록 영향을 미쳤다.
갈레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제국에 위협입니다. 그들은 국가 종교를 거부합니다. 그들의 수가 너무 많아졌습니다.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제국이 위험합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주저했다. 그는 40년간의 평화를 알고 있었다. 박해가 효과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갈레리우스는 끈질겼다. 또한 제국의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는 압력도 있었다. 신들이 로마를 보호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신들을 모욕한다.
마침내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양보했다. 그러나 신중하게 진행하기로 했다. 아폴로 신전에서 신탁을 구했다.
신탁의 대답이 왔다. (물론 이것은 사제들이 꾸민 것이었을 것이다) "지상의 의인들이 신들의 말을 듣지 못하게 방해한다."
의인들이란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결정했다. 박해를 시작하기로.
첫 번째 칙령 (303년 2월 23일)
303년 2월 23일,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생일 하루 전날. 로마의 축제 테르미날리아의 날. 상징적인 날짜였다.
니코메디아(디오클레티아누스의 수도)의 그리스도인 교회가 습격받았다. 군인들이 몰려들어 성경을 찾았다. 제단을 부쉈다. 건물을 파괴했다. 다음 날 불태웠다.
동시에 첫 번째 칙령이 발표되었다.
칙령의 내용:
-
- 모든 교회 건물을 파괴한다
- 모든 성경과 전례서를 몰수하여 불태운다
- 그리스도인들은 모임을 가질 수 없다
- 그리스도인들은 법정에서 고소할 수 없다
- 고위직 그리스도인들은 지위를 잃는다
- 노예 신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해방될 수 없다
이것은 아직 사형을 명령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를 억압하려는 것이었지,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작이었다. 더 나쁜 것이 올 것이었다.
황궁의 화재
며칠 후, 니코메디아의 황궁에 두 번의 화재가 발생했다. 첫 번째는 2월 말, 두 번째는 3월 초.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리스도인들이 방화했다고 확신했다. (실제로는 갈레리우스가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기 위해 불을 질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분노한 황제는 궁정의 그리스도인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다. 환관들이 특히 표적이 되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인이었다.
도로테우스와 고르고니우스라는 두 환관이 고문당하고 교살되었다. 안테무스라는 사제는 참수되었다.
가장 유명한 순교자는 베드로와 마르켈리누스였다. 로마의 사제와 부제였다. 그들은 니코메디아에 있었고, 화재 후 체포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베드로가 감옥에서 간수를 개종시켰다. 간수의 가족도. 그들 모두 함께 세례를 받았다.
베드로와 마르켈리누스는 숲으로 끌려가 참수되었다. 그들의 시신은 숨겨졌다. 그러나 나중에 발견되어 로마의 카타콤에 묻혔다.
두 번째 칙령 (303년 여름)
여름에 두 번째 칙령이 발표되었다.
-
- 모든 성직자(감독, 사제, 집사)를 체포한다
- 그들이 배교할 때까지 감옥에 가둔다
이것은 교회의 지도부를 제거하려는 시도였다. 목자들을 없애면 양들이 흩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감옥이 성직자들로 가득 찼다. 너무 많아서 실제 범죄자들을 가둘 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유세비우스는 기록했다.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각 지방과 각 도시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순교했는지?"
세 번째 칙령 (303년 가을)
가을에 세 번째 칙령. 황제의 20주년 기념일에.
-
- 감옥에 있는 성직자들은 제사를 드리면 석방된다
- 거부하면 고문한다
이것은 자비처럼 보였다. 사실 잔인한 것이었다. 성직자들을 배교시키려는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굴복했다. 고문이 너무 심했다. 약한 자들은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은 향을 피우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저항했다. 그들은 끝까지 버텼다. 고문 속에서 죽었다. 혹은 감옥에서 굶어 죽었다.
네 번째 칙령 (304년 봄) - 전면 박해
304년 봄, 마지막이자 가장 가혹한 칙령이 발표되었다.
-
- 모든 사람이 제사를 드려야 한다
- 거부하는 자는 고문하고 처형한다
이것은 데키우스의 칙령과 비슷했다. 그러나 더 체계적이고 더 잔인했다.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이 선택해야 했다. 배교하거나, 죽거나.
제국 전역에서 순교가 일어났다.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것이 "대박해(Great Persecution)"라고 불리는 이유다.
각 지역의 상황
박해의 강도는 지역마다 달랐다.
동방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갈레리우스의 영역)
가장 심했다. 갈레리우스가 특히 잔인했다.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에서 수천 명이 순교했다. 온 가족이 함께 순교하는 경우도 많았다.
유세비우스가 직접 목격하고 기록했다:
"우리는 한 번에 10명, 20명, 30명, 심지어 60명의 남녀와 어린이들이 칼과 불과 십자가로 하루에 처형되는 것을 보았다."
"어떤 이들은 참수되었고, 어떤 이들은 불에 형벌을 받았다. 칼이 사용에 무뎌지고 산산조각이 났다. 집행자들이 지쳐서 교대해야 했다."
서방 (막시미아누스의 영역)
이탈리아, 아프리카, 스페인에서도 박해가 있었다. 그러나 동방보다는 덜 심했다.
막시미아누스는 잔인했지만 덜 열성적이었다. 특히 로마에서는 귀족 그리스도인들이 많아 조심스러웠다.
북아프리카에서는 특별한 문제가 생겼다. 많은 감독들이 성경을 넘겨주었다. "배신자들(traditores)"이라 불렸다. 이것이 후에 도나투스 논쟁을 일으켰다.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콘스탄티우스의 영역)
가장 약했다. 콘스탄티우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호의적이었다. 그의 아내 헬레나가 그리스도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는 최소한으로 칙령을 집행했다. 교회 건물 몇 개를 파괴하는 선에서 그쳤다. 거의 순교자가 없었다.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가 이 환경에서 자랐다. 이것이 후에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었다.
순교의 방법들
대박해 중 사용된 처형 방법들은 다양하고 끔찍했다.
-
- 참수: 가장 "자비로운" 방법. 로마 시민에게 주로 사용.
- 화형: 산 채로 불태우는 것. 느린 죽음.
- 십자가형: 예수님의 방법. 수치와 고통.
- 맹수: 원형경기장에서. 사자, 표범, 곰에게.
- 검투사 경기: 그리스도인들끼리 싸우게 하거나, 검투사와 싸우게.
- 고문 후 방치: 고문으로 죽게 두는 것. 감옥에서 굶어 죽게.
- 익사: 바다나 강에 던지는 것.
- 사지 찢기: 네 마리 말에 사지를 묶어 찢는 것.
유세비우스는 더 끔찍한 것들을 기록했다:
- "어떤 이들은 손톱으로 전신을 긁혀서 살이 뼈에서 떨어져 나가고 내장이 드러날 때까지 고문당했다."
- "어떤 이들은 발을 묶어 거꾸로 매달아 천천히 타는 불의 연기에 질식시켰다."
- "어떤 이들은 눈을 뽑혔고, 팔다리가 잘렸으며, 코와 귀가 잘렸다."
놀라운 용기들
그러나 순교자들의 용기는 더욱 놀라웠다.
로마누스, 카이사레아의 집사. 그는 재판정에서 담대히 복음을 전했다. 판사가 그의 혀를 자르라고 명령했다. 혀가 잘린 후에도 그는 기적적으로 말을 계속했다고 전해진다. 마침내 교살되었다.
유필루스, 안티옥의 관리. 그는 높은 지위에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좋다." 고문당하고 화형당했다.
테오도투스, 안키라의 여관 주인. 그는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는 일을 했다.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끔찍한 고문 후 참수되었다.
사흘린, 페르시아 출신의 그리스도인. 그는 로마 군대에서 탈영하여 수도사가 되었다. 체포되어 순교했다. 그의 시신이 여러 조각으로 잘려 여러 도시에 전시되었다.
특히 여성 순교자들이 많았다.
아가페, 이레네, 키오니아: 세 자매. 테살로니카 출신. 그들은 성경을 숨겼다가 발각되었다. 화형당했다.
아가타: 시칠리아의 젊은 여성. 아름다워서 총독이 그녀를 원했다. 그녀가 거부하자 그녀를 고문했다. 가슴을 자르는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감옥에서 죽었다.
루시아: 시라쿠사의 처녀. 그녀도 결혼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에게 헌신했다. 눈을 뽑히고 칼로 찔렸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의 눈이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고 한다)
카타리나: 알렉산드리아의 귀족 처녀. 매우 학식이 높았다. 50명의 철학자와 논쟁하여 그들을 이겼다. 황제 막시미누스가 그녀를 원했으나 거부당했다. 가시 달린 바퀴로 고문하려 했으나 바퀴가 부서졌다. 결국 참수되었다.
집단 순교
때로는 집단으로 순교하는 일도 있었다.
테반 군단: 전설에 따르면 이집트 테베 출신의 로마 군단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었다. 황제가 제사를 명령하자 전 군단이 거부했다. 6,600명이 모두 처형되었다고 한다. 지휘관은 마우리티우스였다.
역사적 사실성은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인 군인들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아비티네의 49인: 북아프리카 아비티네에서 49명의 그리스도인이 체포되었다. 그들은 금지된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모두 함께 순교했다. 그들의 말: "주일 없이는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Sine dominico non possumus)."
스키리움의 순교자들: 누미디아에서 대규모 집단 순교.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수백 명으로 추정된다.
이집트의 순교자들
이집트가 특히 심했다. 이집트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가 강한 지역이었다.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안티옥과 함께 3대 교회 중심지였다.
유세비우스가 이집트를 방문하여 직접 목격하고 기록했다.
"우리는 놀라운 열정과 진정한 하나님께 대한 경건함을 보았다. 즉시 판사 앞에 끌려가자마자 어떤 이들은 고문당하고, 어떤 이들은 불로, 어떤 이들은 칼로 다양한 죽음을 겪었다."
"놀라운 것은 판결이 첫 번째 사람에게 선고되자마자, 어떤 이들은 한쪽에서, 어떤 이들은 다른 쪽에서 단상으로 뛰어올라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위협에 아무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고, 끔찍한 고문에도. 오히려 담대히 하나님께 대한 경건함을 말했고, 기쁨과 웃음과 즐거움으로 최종 판결을 받았다. 그들은 마지막 숨까지 찬송하고 감사를 드렸다."
특별히 기억할 만한 순교자들:
성 메나스(Menas): 이집트 군인. 제사 거부로 고문당하고 참수되었다. 그의 무덤이 순례지가 되었고, 큰 성당이 세워졌다.
성 빅터: 알렉산드리아 근처 출신. 로마 군인이었다. 극심한 고문을 견뎌냈다. 마침내 참수되었다.
디오스코로스: 15세 소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 유세비우스가 그의 용기를 특별히 칭찬했다. 어른들이 무너질 때 소년이 담대했다.
팔레스타인의 순교자들
유세비우스가 카이사레아에 있었으므로 팔레스타인 순교자들을 특히 상세히 기록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의 순교자들"이라는 별도의 책을 썼다.
프로코피우스: 예루살렘의 독경자이자 통역자. 카이사레아에서 재판받았다. 판사가 황제들에게 제사드리라고 명령했다.
프로코피우스가 대답했다. "많은 신들이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한 분 하나님만 계시며, 그분이 모든 것의 창조자이십니다."
그는 즉시 참수되었다. 대박해의 첫 순교자 중 한 명이었다. 303년 6월 7일.
알파이우스: 카이사레아 출신.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발바닥에 못을 박는 고문을 당했다. 그럼에도 걸어서 화형대로 갔다. 불 속에서 찬송했다.
로마누스: (앞서 언급한 카이사레아의 집사) 유세비우스가 그의 순교를 자세히 기록했다. 그는 재판정에서 용감하게 신앙을 변호했다. 고문관들이 지칠 때까지 고문을 견뎌냈다. 혀가 잘렸으나 계속 말했다. 마침내 교살되었다. 307년 11월 17일.
팜필루스: 유세비우스의 스승. 위대한 학자이자 오리게네스 저작의 수집가. 그는 2년간 감옥에 있으면서도 계속 저술했다. 유세비우스가 그를 돕기 위해 감옥에 함께 있었다. 310년 2월 16일, 다른 11명과 함께 순교했다.
유세비우스는 자신의 이름을 "팜필루스의 유세비우스"로 바꿨다. 스승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배교의 유혹
그러나 모두가 견딘 것은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무너졌다.
고문은 너무 끔찍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 가장 용감한 자도 흔들렸다.
가족이 문제였다. 한 사람의 고집이 온 가족을 위험에 빠뜨렸다. 부모가 자식을 보며, 자식이 부모를 보며 고민했다.
"내가 죽으면 누가 그들을 돌볼 것인가?"
유세비우스는 기록했다:
"어떤 이들은 첫 번째 공격에 무너졌다. 어떤 이들은 두세 차례 고문을 견뎌냈으나 결국 굴복했다. 어떤 이들은 오랜 투옥과 굶주림으로 지쳐 배교했다."
"여성들은 특별한 고통을 겪었다. 순결을 잃을 것이라는 위협이 때로는 고문보다 더 무서웠다."
일부는 타협을 찾으려 했다. 형식적으로만 제사를 드리고 마음으로는 그리스도를 믿으면 되지 않을까?
일부는 뇌물로 증명서를 샀다. 실제로 제사를 드리지 않고.
이것들이 후에 큰 문제가 되었다. 배교자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누가 진정한 교회의 일원인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퇴위 (305년)
305년 5월 1일,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자발적으로 퇴위했다. 로마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건강이 나빠졌다. 일년 전 심한 병을 앓았다. 그는 자신의 사두정치 체제가 원활하게 작동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동시에 서방의 막시미아누스도 퇴위했다. (비록 그는 마지못해 했지만)
새로운 아우구스투스들이 임명되었다:
-
- 동방: 갈레리우스
- 서방: 콘스탄티우스
새로운 카이사르들:
-
- 동방: 막시미누스 다이아
- 서방: 세베루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달마티아의 스플리트에 있는 거대한 궁전으로 은퇴했다. 채소를 가꾸며 여생을 보냈다. 후에 그가 박해를 재개하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만약 당신들이 내가 손으로 키운 이 양배추를 본다면, 그런 제안은 하지 않을 것이오."
갈레리우스의 박해 계속
그러나 박해는 끝나지 않았다. 갈레리우스가 동방에서 계속 강화했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보다 더 잔인했다. 더 많은 순교자가 나왔다.
세바스티아누스: 로마 군인이었다. 근위대 장교였다. 비밀리에 그리스도인이었다. 발각되어 화살로 처형되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으나 다시 체포되어 곤봉으로 맞아 죽었다. 288년경의 일로 기록되지만, 일부 학자들은 대박해 시기로 본다.
게오르기우스: 카파도키아 출신 군인. 높은 계급이었다. 제사를 거부하여 고문당했다. 바퀴에 묶여 찢어지고, 끓는 기름에 던져지고, 석회로 태워졌다고 전해진다. 303년 4월 23일 참수되었다. 후에 영국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아나스타시아: 로마의 귀족 여성. 그녀는 비밀리에 투옥된 그리스도인들을 돌보았다. 발각되어 배에 태워진 채 불태워졌다. 304년 12월 25일.
서방의 평화
서방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콘스탄티우스가 306년에 죽었다.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가 군대에 의해 아우구스투스로 선포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관용적이었다.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서 박해가 사실상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서는 복잡했다. 여러 경쟁자들이 권력을 다투었다. 막센티우스가 로마를 장악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이용하려 했다. 박해를 중단하고 그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갈레리우스의 관용 칙령 (311년)
311년 4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갈레리우스가 관용 칙령을 발표했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끔찍한 병에 걸렸다. 내장이 썩어가고 있었다. 고통이 극심했다. (일부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았다)
죽음을 앞두고 갈레리우스는 마음을 바꿨다. 혹은 어쩌면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구하고 싶었을지도.
칙령의 내용: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존재할 수 있고 그들의 모임을 가질 수 있도록 허용하기로 했다. 단,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한에서."
"그들이 우리의 관용을 경험한 만큼, 그들은 자신들의 신에게 우리와 국가와 그들 자신의 안녕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8년간의 대박해가 공식적으로 끝났다. 동방에서도.
며칠 후, 갈레리우스가 죽었다. 그의 후계자들은 박해를 재개하지 않았다.
막시미누스 다이아의 마지막 시도
그러나 한 사람이 예외였다. 동방의 막시미누스
그는 갈레리우스의 칙령을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그러나 312-313년에 다시 박해를 시도했다.
여러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이 순교했다. 안티옥의 감독 틸로스의 피터(Peter of Tillo)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것은 짧았다. 313년, 막시미누스가 리키니우스와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도망치다 병으로 죽었다.
제19장: 콘스탄티누스와 승리
밀비우스 다리 전투 (312년 10월 28일)
콘스탄티누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막센티우스를 제거하고 서방 전체를 장악하기 위해.
로마 북쪽, 밀비우스 다리에서 두 군대가 마주쳤다. 막센티우스의 군대가 더 컸다. 콘스탄티누스는 불리했다.
전투 전날 밤, 콘스탄티누스가 환상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혹은 낮에 하늘에서 보았다는 버전도 있다)
하늘에 빛나는 십자가가 나타났다. 그리스어로 글자들이 있었다: "ΕΝ ΤΟΥΤΩ ΝΙΚΑ (엔 투토 니카)" - "이것으로 정복하라(In hoc signo vinces)."
혹은 라틴어로: "Hoc signo victor eris" - "이 표시로 승리자가 되리라."
콘스탄티누스가 명령했다. 모든 병사의 방패에 그리스도의 표시를 그리라고. 카이-로(☧),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첫 두 글자.
다음 날 전투가 시작되었다. 막센티우스의 군대가 무너졌다. 그들이 다리를 건너 도망치려 했으나 다리가 무너졌다. 막센티우스가 테베레 강에 빠져 익사했다.
콘스탄티누스가 승리했다. 그는 로마에 입성하여 환영받았다.
이것이 전환점이었다. 그리스도교 역사의 분수령이었다.
밀라노 칙령 (313년)
313년, 콘스탄티누스와 동방의 리키니우스가 밀라노에서 만났다. 그들은 합의에 도달했다.
밀라노 칙령(정확히는 칙령이 아니라 합의문):
"우리는... 그리스도인들과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선택하는 종교를 따를 완전한 자유를 부여하기로 결정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속했던 모든 장소는... 즉시 그리고 주저 없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반환되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관용이 아니었다. 종교의 자유였다. 그리스도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더 나아가 콘스탄티누스는 교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
- 성직자들을 시민 의무에서 면제했다
- 교회에 재정적 지원을 했다
- 주일을 공휴일로 정했다
- 교회 건물을 짓도록 지원했다
교회의 새로운 도전
승리는 새로운 도전을 가져왔다.
정체성의 위기: 300년간 교회는 박해받는 소수였다. 이제 권력과 가까워졌다. 어떻게 순수성을 유지할 것인가?
대량 개종: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사회적 이유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진정한 회심 없이.
순교의 의미: 더 이상 피 흘릴 필요가 없었다. 순교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렇다면 어떻게 급진적 제자도를 살 것인가?
도나투스 논쟁: 북아프리카에서 심각한 분열이 일어났다. 박해 중 배교한 감독들이 다시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가?
도나투스파는 거부했다. "배신자들이 집행한 성례는 무효다. 순수한 교회만이 진정한 교회다."
카톨릭측은 반대했다. "성례의 효력은 집행자의 도덕성에 달려있지 않다. 회개한 자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논쟁은 한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학적으로 해결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오래 지속되었다.
아리우스 논쟁: 더 심각한 신학적 논쟁이 일어났다.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가 주장했다. "성자는 성부와 동등하지 않다. 그는 피조물 중 첫째다."
이것은 교회를 분열시켰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318명의 감독이 모였다. 많은 이들이 박해의 흉터를 가지고 있었다.
공의회는 아리우스를 정죄했다. 니케아 신조를 채택했다: "성자는 성부와 동일 본질(homoousios)이다."
그러나 논쟁은 계속되었다. 아리우스주의는 수십 년간 교회를 괴롭혔다.
제20장: 순교의 유산
순교자들의 기념
교회는 순교자들을 결코 잊지 않았다.
순교록(Martyrologia): 순교자들의 이름과 날짜를 기록한 목록. 매일 그날 순교한 자들을 기념했다.
순교자 행전(Acta Martyrum): 순교 이야기를 상세히 기록. 후세에 전승.
바실리카: 순교자의 무덤 위에 큰 교회를 세웠다. 베드로, 바울, 로렌스, 아녜스 등의 바실리카가 로마에 세워졌다.
순례: 순교자의 무덤이 순례지가 되었다. 사람들이 치유와 축복을 구하러 왔다.
유물 숭배: 순교자의 뼈, 옷, 소지품이 귀하게 여겨졌다. 이것이 후에 논쟁거리가 되었지만, 순교자에 대한 존경을 보여주었다.
순교의 신학
초대 교회는 순교에 대한 깊은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리스도를 닮음: 순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함께 영광도 받으리라" (로마서 8:17)
증언(Martyria): 순교자(martys)는 "증인"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한다. 죽음으로.
세례의 완성: 순교는 "피의 세례"로 불렸다. 물의 세례가 옛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면, 순교는 육신까지 죽이는 완전한 세례다.
두 번째 세례: 배교한 자도 순교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순교가 모든 죄를 씻는다고.
교회의 기초: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교회는 순교자들의 증언 위에 세워졌다.
종말론적 의미: 순교자들은 이미 부활의 첫 열매다. 그들은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한다. 요한계시록이 보여준 환상.
수도원 운동과 백색 순교
더 이상 피 흘리는 순교가 없게 되자, 새로운 형태의 순교가 나타났다.
금욕주의: 육신의 욕망을 죽이는 것. 금식, 철야, 독신.
사막의 교부들: 세상을 떠나 하나님만 추구. 안토니우스, 파코미우스, 마카리우스.
수도원: 공동체로 모여 금욕적 삶. 동방의 바실리우스, 서방의 베네딕투스가 규칙을 만들었다.
이것은 "백색 순교"라 불렸다. 피(적색)는 흘리지 않지만, 자아를 죽이는 순교.
아일랜드 전통에는 "녹색 순교"도 있었다. 선교를 위해 고향을 떠나는 것. 안락을 포기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
순교 정신의 계승
진정한 유산은 순교 정신이었다.
-
- 타협하지 않는 신앙: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진리를 지킨다.
- 죽음보다 강한 사랑: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생명도 기꺼이 바친다.
- 세상을 초월한 희망: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부활과 천국이 기다린다.
- 용서와 사랑: 원수까지 사랑한다. 스데반과 페르페투아처럼.
- 기쁨의 순종: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하여.
이 정신은 시대를 초월한다. 박해가 있든 없든, 순교자의 정신은 계속된다.
현대의 순교
놀랍게도 순교는 끝나지 않았다. 20세기는 순교자가 가장 많았던 세기였다.
공산주의 국가들: 소련, 중국, 북한에서 수백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순교했다.
나치 독일: 본회퍼, 에디트 슈타인, 막시밀리안 콜베 등.
이슬람 국가들: 중동,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에서 계속되는 박해.
21세기: 여전히 매년 수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신앙 때문에 죽는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말은 여전히 진실이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에필로그: 우리에게 남긴 것
촛불의 비유
카타콤 벽에 새겨진 그림이 하나 있다. 한 손이 다른 손에 촛불을 전해주는 그림.
초대교회 순교자들은 우리에게 촛불을 전해주었다. 신앙의 빛을. 피로 값 치른 빛을.
베드로는 그 빛을 바울에게 전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폴리캅은 이레니우스에게. 페르페투아는 펠리키타스에게. 키프리아누스는 북아프리카 교회에게.
그 빛이 어둠을 뚫고 우리에게 왔다. 2000년의 시간을 넘어.
그들이 증언한 것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은 무엇인가?
진리의 실재성: 그들은 추상적 신학을 위해 죽지 않았다. 그들이 본 것, 경험한 것, 확신한 것을 위해 죽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신앙의 능력: 무엇이 노예 소녀 블란디나를 황제보다 강하게 만들었는가? 무엇이 페르페투아에게 아기를 포기하게 했는가? 신앙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었다.
죽음의 패배: 순교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 부활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승리: 증오가 아니라 사랑으로 이겼다. 복수가 아니라 용서로. 스데반이 외쳤듯이: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교회의 본질: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조직이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분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된 사람들의 공동체다.
우리에게 주는 도전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삶보다 귀한가?: 순교자들은 대답했다. 그리스도. 진리. 영원. 우리의 대답은?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는 박해받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매일 선택한다. 세상에 순응할 것인가,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가?
무엇을 위해 죽을 수 있는가?: 이것이 진짜 질문이다. 무엇을 위해 죽을 수 있는가를 아는 사람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안다.
순교 정신: 피 흘림이 없어도 순교 정신으로 살 수 있다. 매일 자아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마지막 말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 마태복음 5:10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은 이 말씀을 살았다. 그들은 복 있는 자들이었다. 고통 속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그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우리가 그 신앙을 이어가는 한.
촛불은 여전히 타오른다. 어둠 속에서.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전해지며.
이제 우리 차례다. 그 빛을 받아 들고, 다음 세대에 전해줄 차례.
부록: 주요 순교자 목록
1세기
-
- 스데반 (c.34): 최초의 순교자
- 야고보 (44): 열두 사도 중 첫 순교자
- 베드로 (c.64): 거꾸로 십자가에
- 바울 (c.64-67): 참수형
2세기
-
- 이그나티우스 (c.110): 맹수에게
- 폴리캅 (155): 화형
- 저스틴 (c.165): 참수
- 리옹의 순교자들 (177): 블란디나, 포티누스 등
- 스킬리 순교자들 (180): 북아프리카 최초
3세기
-
- 페르페투아와 펠리키타스 (203): 맹수와 검
- 식스투스 2세 (258): 로마 감독
- 로렌스 (258): 화형대
- 키프리아누스 (258): 카르타고 감독
대박해 (303-313)
-
- 프로코피우스 (303): 첫 희생자
- 로마누스 (304): 혀가 잘림
- 아가페, 이레네, 키오니아 (304): 세 자매
- 게오르기우스 (303): 용을 죽인 성인
- 아나스타시아 (304): 배에서 화형
- 팜필루스 (310): 유세비우스의 스승
기억해야 할 이름들
이 목록은 빙산의 일각이다. 수백만 명의 이름 없는 순교자들이 있었다. 기록되지 않은 자들. 잊혀진 자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하신다.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
"내가 보니 제단 아래에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이 있어...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 요한계시록 6:9,11
"세상의 어둠이 아무리 짙어도, 한 줄기 빛이면 충분하다. 순교자들이 그것을 증명했다. 피로 쓴 신앙은 시간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빛난다."
"그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우리가 그 신앙을 이어가는 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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