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교회의 공의회 수용 차이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진 두 전통
초대 7대 공의회는 모두 로마 제국의 통일된 신앙 체계 안에서 열린 보편 공의회(ecumenical council)였습니다. 당시 교회는 아직 하나였고, 동방과 서방의 주교들이 함께 모여 신앙의 핵심 문제들을 논의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이 공의회들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신학적 견해의 불일치를 넘어서, 교회의 본질과 권위, 구원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을 반영합니다.

| 공의회 인식의 범위: 언제까지가 '보편적'인가?
동방정교회와 서방 가톨릭교회가 가장 명확하게 갈라지는 지점은 어떤 공의회를 진정한 보편 공의회로 인정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는 단순한 숫자의 차이가 아니라, 교회의 권위와 전통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냅니다.

동방정교회는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년)까지의 일곱 개 공의회만을 진정한 보편 공의회로 인정합니다. 왜 정확히 일곱 개일까요?
동방 전통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함을 상징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일곱 공의회가 동방과 서방이 아직 완전히 분리되기 전, 즉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였을 때 열렸다는 점입니다. 787년 이후, 특히 1054년 동서 교회의 대분열(Great Schism) 이후에 서방에서 단독으로 개최한 공의회들은 동방정교회의 관점에서 볼 때 더 이상 "보편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서방교회의 지역 공의회일 뿐입니다. 따라서 트렌트 공의회(1545-1563년)나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 같은 후대의 가톨릭 공의회들은 동방정교회에게는 구속력이 없는 것입니다.

반면 서방 가톨릭교회는 7대 공의회 이후에도 계속해서 보편 공의회를 개최했으며, 현재까지 총 21차의 보편 공의회를 인정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가톨릭 교회는 로마 교황이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교회 전체에 대한 수위권(primacy)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교황이 승인하고 주재하는 공의회는, 설령 동방교회가 참여하지 않더라도, 보편 공의회로서의 권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70년)에서 교황 무류성(papal infallibility) 교리가 선포된 이후, 교황의 권위는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이 교리에 따르면, 교황이 신앙과 도덕에 관한 문제를 최종적으로 선언할 때는 오류가 없다고 간주됩니다.
이러한 차이는 교회의 권위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이해를 보여줍니다. 동방교회는 권위가 교회 전체의 합의, 특히 주교들의 집단적 판단에 있다고 보는 반면, 서방교회는 로마 교황이라는 단일한 중심에 최종 권위가 있다고 봅니다.
| 신학적 강조점의 차이: 신비인가, 법인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같은 공의회 결정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방식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이는 각각의 전통이 발전시켜온 독특한 신학적 감수성을 반영합니다.
동방교회
동방교회는 데오시스(θέωσις, theōsis), 즉 '신화(神化)' 또는 '신적 참여'라는 개념을 구원론의 중심에 놓습니다. 이는 인간이 은총을 통해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아타나시우스의 유명한 말처럼,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이 신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여기서 '신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ousia)과 동일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참여하여 변화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공의회의 결정들은 단순히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구원론적 지도입니다. 성육신 교리가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을 하나로 결합하심으로써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길을 여셨기 때문입니다.
동방교회는 또한 교회의 결정을 심포니아(symphonia), 즉 '조화로운 합의'로 이해합니다. 이는 오케스트라의 다양한 악기들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교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성령의 인도 하에 진리에 대한 공통된 이해에 도달한다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공의회의 권위는 단순히 주교들의 투표나 황제의 승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성령 안에서 이루는 합의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동방교회가 공의회 이후에도 그 결정들이 교회 전체에 의해 '수용(reception)'되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입니다.
서방교회
반면 서방교회는 마지스테리움(magisterium), 즉 '교도권'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는 교회가 신앙과 도덕에 관한 진리를 권위 있게 가르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교리입니다. 이 권한은 주교들, 특히 로마 교황에게 부여되어 있습니다. 서방 전통은 법적이고 제도적인 질서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로마 제국의 법률 체계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유산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공의회의 결정들은 정확하게 문서화되고, 교회법으로 체계화되며, 교황청의 권위로 시행됩니다. 이러한 접근은 명확성과 통일성을 제공하지만, 동방의 관점에서는 지나치게 법률주의적이고 경직되어 보일 수 있습니다.
이 두 접근 방식의 차이는 예를 들어 성례전을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나타납니다. 서방교회는 성례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정확하게 설명하려 했습니다. 성체성사에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실체변화(transubstantiation)"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반면 동방교회는 이를 신비(mystery)로 남겨두는 것을 선호하며,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되 정확한 메커니즘을 규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 그리스도론의 수용 차이: 칼케돈의 유산과 분열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론의 정통 교리를 확립했지만, 동시에 기독교 세계의 첫 번째 주요 분열을 야기했습니다. 이 분열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기독교 동방 전통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칼케돈 공의회 이후, 동방의 여러 교회들은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 이집트의 콥트교회, 에티오피아정교회, 시리아정교회, 아르메니아사도교회, 인도의 말란카라정교회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오늘날 "오리엔탈 정교회(Oriental Orthodox Churches)"로 불리며,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 Churches)"와는 구별됩니다. 이 명칭의 차이가 혼란스러울 수 있는데, 간단히 정리하면 동방정교회는 칼케돈 공의회를 받아들인 그리스, 러시아, 세르비아 등의 교회들이고, 오리엔탈 정교회는 칼케돈을 거부한 이집트, 에티오피아, 아르메니아 등의 교회들입니다.
왜 이들은 칼케돈을 거부했을까요? 표면적으로는 신학적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칼케돈 공의회가 네스토리우스주의에 너무 가깝다고 느꼈고, "두 본성"이라는 표현이 그리스도의 통일성을 위협한다고 우려했습니다. 대신 이들은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가 사용한 "성육신한 하나님 말씀의 하나의 본성"이라는 표현을 선호했습니다. 그러나 단성론(Monophysitism)이라는 비난을 받는 것을 거부하며, 자신들은 에우티케스의 극단적 단성론을 따르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미아피지트(Miaphysite), 즉 "하나의 본성"을 고백하는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분열에는 신학 이상의 요소들이 작용했습니다. 정치적, 문화적, 언어적 요인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교회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로마의 지배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칼케돈 공의회는 비잔틴 황제의 강력한 영향 하에 진행되었고, 많은 동방 기독교인들은 이를 제국주의적 강요로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엘리트들과 콥트어나 시리아어를 사용하는 지역 주민들 사이의 문화적 간극도 작용했습니다.
흥미롭게도 20세기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분열이 주로 용어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습니다. 1970년대부터 칼케돈 정교회(동방정교회와 가톨릭)와 오리엔탈 정교회 사이에 신학 대화가 진행되었고, 많은 경우 실제 신학적 내용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양측 모두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시고, 두 본성이 혼합되지도 분리되지도 않는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차이는 주로 이를 표현하는 철학적 용어와 강조점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1500년 이상의 분리는 각 전통이 독특한 전례, 영성, 신학적 표현을 발전시키게 했고, 재통일은 여전히 복잡한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서방교회는 칼케돈 신조를 기독교 정통 교리의 확고한 표준으로 확립했습니다. 이후 16세기 종교개혁을 거쳐 탄생한 개신교 교회들도 대부분 칼케돈 신조를 포함한 초대 공의회들의 교리를 받아들였습니다. 루터교, 개혁교회, 성공회 등 주류 개신교 전통들은 모두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과 칼케돈 신조를 정통 교리로 고백합니다. 이는 종교개혁이 중세 가톨릭교회의 특정 실천들과 교리들(면죄부, 교황의 수위권 등)에 반대했지만, 초대 공의회들이 정립한 기본적인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은 계승했음을 보여줍니다.
| 언어와 문화적 차이: 사고방식의 갈림길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차이를 이해하는 또 다른 중요한 열쇠는 언어와 문화적 배경입니다. 이는 단순히 표면적인 차이가 아니라, 신학을 구성하고 표현하는 근본적인 방식의 차이를 만들어냈습니다.


동방교회는 헬라어(그리스어) 전통 속에서 발전했습니다. 그리스어는 미묘한 철학적 구분을 표현하는 데 탁월한 언어였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형이상학적 사고를 위한 정교한 어휘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우시아(ousia, 본질)와 휘포스타시스(hypostasis, 위격), 피시스(physis, 본성)와 프로소폰(prosopon, 위격/인격) 같은 용어들은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 교부들은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하면서도 항상 신학적 언어의 한계를 인식했습니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이나 위(僞) 디오니시우스 같은 신학자들은 부정신학(apophatic theology)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말할 수 없는 것이 더 많다는 인식, 즉 하나님의 초월성과 신비를 강조하는 신학적 접근입니다. 따라서 동방 신학은 논리적 정밀성과 신비적 겸손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서방교회는 라틴어 전통 속에서 발전했습니다. 라틴어는 로마 법률 체계를 위해 발전한 언어로, 명확성, 정확성, 법적 구분을 강조합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실체(substantia) 안에 세 위격(personae)"이라는 라틴어 공식을 만들었고, 이는 서방 신학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를 인간의 심리적 유비(기억, 지성, 의지)로 설명하려 했고, 이는 서방 신학의 내재적이고 심리학적인 접근을 보여줍니다. 중세 스콜라 철학에 이르러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사용하여 신학을 체계적인 과학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명확성과 논리적 일관성을 제공했지만, 동방의 관점에서는 신의 신비를 지나치게 합리화하고 체계화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습니다.
문화적으로도 동방과 서방은 다른 유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방은 비잔틴 제국의 연속성 속에서 황제와 총대주교의 협력 관계(심포니아)를 발전시켰습니다. 교회와 국가는 구별되지만 조화롭게 협력해야 한다는 이상이었습니다. 서방은 서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교황이 정치적 공백을 채우며 독립적인 권력 기반을 구축했습니다. 교황은 단순히 종교적 지도자가 아니라 세속 군주로서의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의 차이는 교회의 권위와 자율성을 이해하는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전례와 영성의 차이도 있습니다. 동방교회의 전례는 장엄하고 신비롭습니다. 성상(이콘)은 "천국의 창문"으로 여겨지며, 전례는 지상과 천상이 만나는 경험으로 이해됩니다. 서방교회의 전례는 역사적으로 더 간결하고 교훈적인 경향이 있었습니다(물론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라틴어 미사는 사제가 회중을 등지고 조용히 집전하는 형태였고, 개신교 예배는 설교와 말씀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러한 차이들이 누적되면서, 동방과 서방은 같은 교리적 기초 위에 서 있으면서도 매우 다른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경험하고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1054년의 대분열은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쳐 서서히 벌어진 간극이 마침내 공식화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차이는 계속되고 있지만, 동시에 에큐메니컬 대화를 통해 상호 이해와 존중을 추구하는 노력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두 전통 모두 초대 공의회의 유산을 공유하지만, 각자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 유산을 해석하고 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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