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교회의 시련기
사도시대 이후부터
밀라노 칙령까지의 박해사
| 시대적 배경과 박해의 근본 원인
사도 요한이 세상을 떠난 서기 100년경부터 밀라노 칙령이 선포된 313년까지 약 2세기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혹독한 시련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는 사도들의 직접적인 가르침과 영향력이 사라진 후 교회가 홀로서기를 해야 했던 시기로, 후대 역사가들은 이를 속사도 시대 또는 전(前) 니케아 시대라고 명명했습니다.

Henryk Siemiradzki Nero's torches 1882 By Henryk Siemiradzki - Bonhams,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7855487
이 기간 동안 기독교인들이 겪은 박해는 단순히 종교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정치·사회·문화적 구조와 기독교 신앙이 근본적으로 충돌했기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로마 제국은 본질적으로 다신교적 사회였으며, 제국의 통합과 안정을 위해 황제 숭배를 정치적 충성의 표현으로 요구했습니다. 황제에게 분향하고 "카이사르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니라 제국 시민으로서의 충성 서약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님이시다"라는 신앙 고백을 지키기 위해 이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그들에게 황제 숭배는 우상 숭배이자 신앙의 배교였습니다. 이러한 거부는 로마 당국의 입장에서 제국의 신들을 모독하고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반역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제국의 번영이 신들의 은총에 달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의 거부는 신들의 분노를 사서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한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여기에 더해 기독교에 대한 여러 오해와 유언비어가 박해를 부채질했습니다.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눈다는 표현은 식인 풍습으로 왜곡되었고, 초대 교회의 애찬(愛餐) 모임은 형제자매라고 부르며 어두운 곳에서 모인다는 이유로 근친상간적 음란 행위로 오해받았습니다. 또한 가뭄, 홍수, 전염병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기독교인들이 우리 신들을 분노케 했다"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터툴리안은 이런 상황을 "티베리스 강이 범람하거나 나일 강이 마르면,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사자에게 던져라!'고 외친다"고 기록했습니다.
| 2세기: 산발적 박해에서 조직적 탄압으로
2세기 초중반까지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주로 지역적이고 산발적인 성격을 띠었습니다. 트라야누스 황제(재위 98-117년) 시기에 소(小)플리니우스가 비티니아 총독으로 재직하면서 황제에게 보낸 서신은 당시 박해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플리니우스는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며, 그들이 황제에게 제사를 드리고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석방해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트라야누스는 기독교인을 적극적으로 색출하지는 말되 고발당하면 처벌하라는 애매한 답변을 보냈습니다. 이는 로마 제국이 초기에는 기독교를 체계적으로 말살하려는 의도보다는, 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집단으로 간주하여 경우에 따라 탄압했음을 보여줍니다.

The Christian Martyrs' Last Prayer By 장레옹 제롬 - 월터스 미술관: Home page Info about artwork,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8824108
그러나 2세기 후반으로 가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재위 161-180년)는 스토아 철학자로서 지혜와 덕목으로 유명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기독교 박해가 심화되었습니다. 철학자 황제로 칭송받던 그는 기독교인들의 순교 의지를 이성적이지 못한 완고함으로 보았고, 이들이 제국의 전통과 안정을 위협한다고 판단했습니다.
177년 갈리아 지방의 루그두눔(리옹)에서 발생한 박해는 이 시기의 참상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리옹과 비엔나의 기독교 공동체는 이교도 군중들의 광적인 폭력에 직면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공개 장소에서 구타당하고, 시장으로 끌려가 온갖 모욕을 받았습니다. 총독은 재판을 통해 배교를 강요했고, 거부하는 이들을 투옥하고 고문했습니다. 이 박해의 생존자들이 소아시아의 교회들에게 보낸 서신이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보존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참혹합니다.
특히 90세의 노령인 폰티누스 감독은 심한 고문을 받고 순교했고, 젊은 청년 아탈루스는 쇠 의자에 묶여 불로 지져지는 형벌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유명한 순교자는 젊은 여종 블란디나였습니다. 그녀는 연약한 체구의 노예였지만, 십자가에 매달리고, 맹수에게 던져지고, 마침내 그물에 싸여 황소에게 받히는 등 온갖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우리는 악한 일을 행하지 않습니다"라는 고백만을 반복했고, 이를 지켜본 이교도들조차 그녀의 용기에 놀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블란디나의 순교는 초대 교회에서 나약한 자도 하나님의 은혜로 강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 3세기: 제국적 규모의 조직적 박해
3세기에 접어들면서 로마 제국은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변경에서는 야만족의 침입이 격화되었고, 내부적으로는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불안정이 가중되었습니다. 이른바 '3세기의 위기'라 불리는 이 시기에 황제들은 제국의 통합을 위해 전통적 로마 종교로의 회귀를 강조했고, 이는 기독교에 대한 더욱 조직적이고 제국 전역에 걸친 박해로 이어졌습니다.

Martyrdom of the Ten Thousand Christians By Albrecht Dürer - The Yorck Project (2002) 10.000 Meisterwerke der Malerei (DVD-ROM), distributed by DIRECTMEDIA Publishing GmbH. ISBN: 3936122202.(Version online: Zeno.org, ID 2000399497X.),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50461
데키우스 황제(재위 249-251년)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제국 전역에서 체계적으로 기독교를 말살하려 시도한 황제였습니다. 250년에 그가 발표한 칙령은 이전의 박해와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이 칙령은 제국의 모든 주민에게 황제가 지정한 날까지 지역 관리들 앞에서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도록 명령했습니다.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리벨루스(libellus)라는 증명서를 받았는데, 이는 일종의 충성 증명서였습니다.
이 증명서 제도는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제사에 참여하거나 증명서 없이 살아가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증명서가 없으면 재산 몰수, 추방, 투옥, 심지어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습니다. 이 박해는 기독교 공동체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많은 이들이 용기 있게 신앙을 고백하며 순교했지만, 적지 않은 수가 배교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실제로 제사를 드렸고(sacrificati), 어떤 이들은 분향만 했으며(thurificati), 또 어떤 이들은 뇌물을 주고 제사를 드린 것처럼 허위 증명서를 구입했습니다(libellatici).
박해가 끝난 후 배교자들의 교회 복귀 문제는 심각한 신학적·목회적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카르타고의 감독 키프리아누스는 배교자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들이 겪은 시련의 정도에 따라 다른 참회 기간을 정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반면 노바티아누스 같은 엄격주의자들은 배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논쟁은 교회론과 죄론에 대한 중요한 신학적 발전을 가져왔고, 교회가 거룩성과 포용성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낳았습니다.
발레리아누스 황제(재위 253-260년)의 박해는 다른 전략을 취했습니다. 257년과 258년에 발표된 그의 칙령들은 일반 평신도보다는 교회 지도층을 겨냥했습니다. 그는 머리를 자르면 몸이 죽는다는 논리로, 감독, 장로, 집사 등 성직자들을 집중적으로 처형했습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의 묘지 출입을 금지하고 모든 종교 집회를 불법화했습니다. 이는 기독교 공동체의 조직적 기반을 무너뜨리려는 시도였습니다.
이 박해 기간 동안 카르타고의 감독 키프리아누스는 처음에는 피신했다가 258년에 체포되어 순교했습니다. 그의 순교 기록은 초대 교회의 중요한 문서로, 재판 과정과 순교의 순간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총독이 그에게 황제들의 명령에 복종하라고 명령하자, 키프리아누스는 단호하게 "나는 기독교인이며 감독입니다. 나는 참된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참수형을 선고받고, 수많은 교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침착하게 순교했습니다. 로마의 감독 식스투스 2세도 같은 해에 카타콤에서 미사를 집전하던 중 체포되어 즉시 처형되었습니다.
| 4세기 초: 대박해의 광풍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84-305년) 치하에서 일어난 박해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조직적이고 잔혹한 탄압으로, '대박해(Persecution Magna)' 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라고 불립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뛰어난 행정가였으며, 위기에 빠진 로마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사두 정치(Tetrarchy) 체제를 도입하고 제국을 개혁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기독교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이었지만, 303년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변화의 배후에는 동방의 공동 황제 갈레리우스와 니코메디아의 고위 관리들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갈레리우스는 광신적인 이교 신봉자로, 기독교를 제국의 안정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신탁을 구하기 위해 행한 제사에서 기독교인 궁정 관리들이 십자가 표시를 그었고, 이것이 점을 방해했다는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303년 2월 23일,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첫 번째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이 칙령은 교회 건물을 철거하고, 성경과 전례 서적을 불태우며, 기독교인들의 공적 모임을 금지했습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법정에서 증인으로 설 수 없고, 고위 공직에서 해임되며, 황제의 자유민이었던 기독교인은 다시 노예 신분으로 전락했습니다. 칙령이 발표된 바로 그날, 니코메디아의 대성당이 황제의 명령으로 파괴되었습니다.
곧이어 303년에 세 차례 더 칙령이 발표되었습니다. 두 번째 칙령은 모든 성직자의 체포를 명령했고, 세 번째 칙령은 투옥된 성직자들에게 이교 신에게 제사를 드리면 석방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304년에 발표된 네 번째이자 가장 가혹한 칙령은 모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제국의 모든 주민이 이교 신에게 제사를 드리도록 강제했습니다. 이는 데키우스의 박해를 훨씬 뛰어넘는 전면적인 탄압이었습니다.
박해의 양상은 제국의 동부와 서부에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서방에서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가 비교적 온건하게 칙령을 집행하여 교회 건물만 철거하고 사람들에게는 관대했습니다. 그러나 동방에서는 갈레리우스와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극도로 잔혹하게 박해를 수행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이집트, 소아시아 지역에서는 수천 명이 온갖 고문 끝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St. Erasmus flogged in the presence of Emperor Diocletian By Marie-Lan Nguyen (2006),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715184
당대의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팔레스타인의 순교자들을 목격하고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는 "하루에 열 명, 스무 명, 때로는 삼십 명, 심지어 예순 명이나 되는 이들이 참수되거나 십자가에 못 박히거나 불에 타는 것을 보았다"고 썼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순교자의 수가 너무 많아 정확한 집계가 불가능했고, 형 집행인들이 피곤해서 교대해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광산으로 보내져 강제 노동을 하다가 죽었고, 어떤 이들은 눈을 도려내고 다리 힘줄을 끊어 불구로 만드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박해 기간 동안 많은 영웅적인 순교자들이 있었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집사 로마누스는 혀가 잘린 후에도 신앙을 고백했고, 이집트의 감독 필레아스는 학자이자 부유한 귀족이었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순교를 선택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파불라는 15세의 어린 소녀였지만 맹수에게 던져지는 순교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초대 교회에 전해져 신앙의 본으로 기념되었습니다.
그러나 박해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었습니다.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퇴위했고, 박해의 주동자였던 갈레리우스가 동방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처음에 박해를 계속했지만, 311년 중병에 걸리자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관용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합법적 종교로 인정하고, 기독교인들이 다시 모임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칙령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자신과 국가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유세비우스는 이를 갈레리우스가 고통 속에서 기독교의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했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평화는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가 313년 밀라노에서 만나 공동으로 종교 자유 칙령을 발표하면서 찾아왔습니다.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으며, 박해 기간 동안 몰수당한 교회 재산을 반환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로써 3세기에 걸친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기독교 박해는 종결되었고, 기독교는 억압받는 소수 종교에서 제국의 주요 종교로 나아가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 순교와 신학: 고난이 남긴 영적 유산
박해 시대의 순교는 단순히 비극적 사건이 아니라, 초대 교회의 신학과 영성을 형성하는 결정적 요소였습니다. 2-3세기 교부들은 순교를 '피의 세례(baptismus sanguinis)'라고 불렀습니다. 순교는 세례를 받지 못한 예비 신자도 즉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의 수단으로 여겨졌으며,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가장 완전한 형태로 이해되었습니다.
터툴리안의 유명한 말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Semen est sanguis Christianorum)"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역사적 현실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평온한 죽음과 용기는 이교도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순교자들은 고문대에서도 찬송을 부르고, 원수를 용서하며,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는 로마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고, 많은 이들이 "이런 확신을 주는 종교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순교자들의 유해는 성유물(聖遺物)로 존경받았고, 그들의 순교 기념일은 교회력의 중요한 날이 되었습니다. 순교지나 순교자의 무덤 위에는 순교자 기념 교회(martyrium)가 세워졌으며, 기독교인들은 이곳에서 모여 성찬식을 거행했습니다. 이는 후대에 성인 공경과 순례 전통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박해는 또한 기독교 변증학(apologetics)의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유스티누스, 아테나고라스, 터툴리안, 오리게네스 같은 변증가들은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반박하고,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과 도덕성을 변호하는 글들을 썼습니다. 이들의 작품은 지성인들에게 기독교를 소개하고, 교회 내부적으로는 신학적 사고를 심화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더 나아가 순교는 기독교 윤리의 핵심을 형성했습니다. 순교자들의 본은 모든 기독교인이 추구해야 할 영적 이상이 되었고, 비록 모든 이가 순교를 경험하지는 않더라도 순교자와 같은 헌신과 충성을 일상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백색 순교(white martyrdom)' 또는 '무혈 순교'의 개념이 발전했습니다. 이는 후에 수도원 운동의 영적 기초가 되었습니다. 박해가 끝나고 순교의 기회가 사라지자,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떠나 금욕적 삶을 사는 것을 또 다른 형태의 순교로 여기고 사막으로 나아갔습니다.
박해 시대는 또한 교회 조직의 발전을 촉진했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감독들의 역할이 중요해졌고, 지역 교회들 간의 연대와 소통이 강화되었습니다. 박해를 피해 다른 지역으로 도피한 기독교인들은 그곳에서 복음을 전파했고, 이는 역설적으로 기독교의 지리적 확산을 가져왔습니다.

Vision of the Cross By School of Raphael - See below.,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0199977
| 박해에서 승리로: 역사적 의미
약 2세기에 걸친 박해의 시기는 기독교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박해는 교회를 약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순수하게 만들었고, 진정한 신자와 명목상의 신자를 구별하는 도가니가 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의 증언(그리스어 'martyr'는 '증인'을 의미합니다)은 복음의 진리를 세상에 가장 강력하게 선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밀라노 칙령 이후 기독교는 급속히 성장하여 4세기 말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순교자들이 보여준 신앙의 순수성과 헌신은 모든 시대 기독교인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이 단순히 지적 동의나 문화적 관습이 아니라, 생명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살아있는 진리임을 증명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영웅을 추모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이 보여준 신앙의 본질을 배우기 위함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 죽음보다 강한 사랑, 고난 속에서도 빛나는 소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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